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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심볼

 
■ 한국문화상징

[한복]

[한글]

[김치]

[불고기]

[불국사]

[석굴암 ]

[태권도]

[고려인삼]

[탈춤]

[종묘제례악]
 
 
한복은 한국인들이 오랜 기간 착용해 온 한국의 전통 복식을 의미한다. 한복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애용하는 한민족의 민족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복은 한국인의 얼굴이며, 한복에는 한국인들의 사상과 미의식이 그대로 배어있다. 한복은 평면으로 재단하여 입으면서 입체적인 성격이 부각되는 특징이 있다. 그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크기에 여유가 있어서 어떠한 체형의 사람에게도 풍성하게 잘 맞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풍성한 형태미를 지닌 한복은 한옥의 좌식 생활에 적합하며 착용자에게 일종의 위엄과 우아함을 부여한다. 단순한 형태의 한복은 그러므로 착용자의 입음새에 따라 맵시가 드러나며, 입음새에 따라 생기는 주름은 한복의 형태미를 시각화하는 미적 요소가 된다.

풍성한 형태미를 보이는 한복은 융통성이 있어 보이며, 유동적인 선을 미적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두루마기나 바지, 치마 등은 착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혹은 외부의 영향에 의해 흔들리는 유연함이 미적인 특징이 되기도 하다. 족두리, 화관, 노리개, 부채 등 장신구에도 섬세한 술장식과 떨새 등을 부착하여 착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고 떨리는 효과를 표현하고 있다.

자연미를 존중한 반듯한 선과 곡선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한복에 보이는 곡선은 착용자의 윤곽선, 저고리의 각 부위, 흔들리는 요소에서 발견되는 미적 특징으로 시대에 따라 다른 모양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은 단일 민족국가로 고유한 말과 글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은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글자를 사용한다.1392년 조선왕조가 세워질 무렵, 한국인의 어문생활(語文生活)은 양반층의 한문(漢文)과 중인층의 이두(吏讀)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음성언어로는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문자언어로는 양반층과 중인층이 각기 다른 한문과 이두를 사용함으로써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世宗)이 세종 25년(서기 1443년) 마침내 독창적인 한글을 창제하였다. 궁궐 안에 ‘집현전’이라는 연구기관을 세우고 여러 학자를 불러모아 천문학, 과학, 언어학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꾸준히 연구했었던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예로부터 한국인이 써온 한국말을 쉽게 기록할 글자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한글이다. 처음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었는데, 그 뜻처럼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도록 문자구조가 간단하고 단순하다.

한글은 발성(發聲) 기관의 소리내는 모양에 따라 체계적으로 창제된 과학적인 문자일 뿐 아니라, 나아가 문자 자체가 소리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다.다시 말해 한글은 한 글자가 한 음소(音素)를 표시하는 음소문자로 읽기 편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또한 한글은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이 한눈에 구분되는 글자라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소리를 가진 문자학적으로 으뜸가는 글자이다.무엇보다도 한글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로서 배워서 익히기가 극히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국제기구에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퇴치(文盲退治)에 공이 큰 이들에게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상의 이름이 세종이라는 이름을 딴 것은 세종 임금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서 문맹자를 없애는 글임을 세계가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한글 덕분에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김치란 주원료인 절임 배추에 여러 가지 양념류(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및 무 등)젓갈을 혼합하여 제품의 보존성과 숙성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저온에서 젖산생성을 통해 발효된 제품을 일컬는다.

한국 음식들을 살펴보면 주식(主食), 부식(副食)의 개념이 뚜렷하지 않은 서양이나 아프리카 음식과는 달리, 곡류(穀類)가 기본이 되는 주식과 이를 맛있게 먹게 하는 채소, 젓갈, 어육류가 중심이 되는 부식으로 구별되어 있다.그런데 긴 겨울을 넘겨야 하는 한국에서 채소, 생선 등을 지속적, 안정적으로 먹기 위해서는 우선 건조시키는 방식이 도입되었을 것이나 해안가에서 바닷물을 이용하여 채소를 절여 먹는 방식들이 시도되다가 점차 소금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급되면서 채소를 소금에 절여 두면 오래 신선한 형태로 보관하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침채(沈菜)'는 '팀채', 혹은 '딤채'로 발음되었는데 구개음화로 인해 '짐치'가 되었다가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의 기본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젖산 발효)시킨 것이긴 하나 여기에 부수적으로 다량의 어류와 패류가 들어가 발효를 돕고 나아가 단백질, 칼슘 등 겨울동안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공급하여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인의 조상들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하던 유목민족으로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동이(東夷)계의 맥족(貊族)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가축의 고기를 소비하는 음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그들이 즐겨 먹는 맥적(貊炙)은 고기류(쇠고기)를 꼬챙이에 꽂아 불에 굽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불고기의 원조는 맥적인 이 꼬치구이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즉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나 대체로 중국인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한족(漢族)의 고기굽는 요령은 고기를 미리 조리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무쳐 먹는 데 대하여 이 적(炙)은 미리 조미하여 굽는다. 그래서 이 맥적이 불고기의 시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1천여 년 전에 한반도에 번성하였던 신라와 백제에서는 국교로 신봉되었던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肉食)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맥적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었다. 그 후 고려 때에 와서 유목민족인 몽골의 침입으로 고기 먹는 풍습이 되살아나게 되자 옛 한국의 음식문화인 이 맥적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나지 않았나 여겨진다. 즉 당시 몽고와의 관계가 성립되어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설하멱(雪下覓)이란 이름으로 이것이 되살아나 오늘날의 너비아니가 되었다. 너비아니란 고기를 네모나게 썰어 미리 준비한 양념장으로 간을 한 후 재어 두었다가 번철(燔鐵)에 굽는 조리 방식의 고기 요리를 말한다. 이후 즉석에서 구워 먹을 수 있는 방식이 개발되고 거기에 구멍이 뚫어져 불 위에서 불을 쪼이며 구울 수도 있는 불고기용 특수 장치가 개발되면서 오늘날의 불고기가 정착되었을 것이다.
 
 
 
불국사(佛國寺)는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이다. 이 절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서기 751년)에 김대성(金大城)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石窟庵)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성은 서기 774년까지 24년 동안 이 대사업을 이끌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국가에 의해 완공을 보았는데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축조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 청운교・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개의 건물에 총 2천 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3년 5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 웅장한 대사찰은 불에 타고 말아 선조 37년(1604년)경부터 약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그러다 조선조 말기가 되자 이 사찰의 운명도 기울어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중요 보물들이 도난당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인 1924년에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 대규모의 개수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이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으로 개보수(改補修)가 이루어지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어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73년 6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대부분의 사찰건물들이 그러하듯이 이 불국사 건축에 쓰인 돌과 목재 등의 자재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배치된 공간까지도 인간의 정성과 염원이 깃들이지 않은 것이 없다. 자신의 구원, 부모의 명복, 국가의 안녕, 백성의 평안, 악마의 퇴치 등 이 모든 염원이 돌 하나, 나무 한 토막에도 스며 있다.

1995년 12월, 유네스코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건축물로 인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석굴암은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축조한 것이다. 국보 제24호. 암벽을 뚫어 조성한 인도나 중국의 천연석굴과는 달리 석굴암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촉조한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완성한 인공석굴이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석굴암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다.가난하게 살던 김대성이 죽은 뒤, 재상인 김문량의 가문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석불사:石佛寺)을 짓고,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석굴암의 주실 천장은 돔 구조로 축조하여 지붕의 무게를 적절하게 안배시켜 석재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독특한 축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천장 맨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아로새긴 커다란 돌을 놓아 천개(天蓋)를 삼고 그 옆으로 원을 그리면서 여러 개의 돌덩이들이 둥그런 천장을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작은 돌들은 표면이 튀어나와 자연스러움을 주면서 바깥쪽으로 튀어나간 부분은 천장 위에 덮인 흙을 지탱해 주므로 그 형태와 구조가 기가 막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주실 내부에는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과 제상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고, 전실에는 사천왕상과 인왕상이 각각 마주보고 있어서 그 안정감과 균형감각이 또한 뛰어나다.

석굴암 축조의 과학적 우수성은 놀라운 것으로 일제 때의 한 건축가가 그린 도면의 실측 자료에 의하면 석굴암은 치밀한 수리(數理)체계와 비례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의 미술사학자들이 석굴암의 평면과 입면, 본존불의 크기와 배치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그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계획적인 설계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전실과 광창(光窓)의 존재 여부, 천장의 구조, 습기와 누수 차단 방법 등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냈으며 아직도 석굴암이 안고 있는 수수께끼는 많다. 인공적으로 축조하여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부처의 세계를 구현해낸 석굴암의 건축미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권도는 한국고유의 전통무예로서 오늘날에는 세계적 운동경기로 자리잡은 ‘온몸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경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태권도는 한국인의 혼이 깃든 하나의 행위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술’의 아름다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적미(靜的美)와 동적미(動的美)가 그것이다. 정적미는 태권도 수련의 정신적 측면으로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묵상 또는 명상으로 표현된다. 품새는 다른 무술이나 운동경기와는 달리 기술적인 면보다는 정신적 수련이 더욱 강조되는 움직임 형식이다. 즉, 공격과 방어의 성격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에서 생성되는, 마음과 함께 하는 움직임이다.동적미는 말 그대로 움직임을 통해 발산되는 아름다움이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그 정신과 사상을 표현하는 측면에서는 무용 동작의 원리와도 유사하다.

태권도는 흰 바지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진행된다. 이 띠는 바지 저고리와 함께 한 벌의 도복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현재 태권도 도복의 띠는 흰색・노랑・파랑・빨강・검정 등의 5색으로 되어 있으나 조금씩 다르게 착용하기도 하며 바지의 큰 고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태권도의 기본 동작은 손과 발을 이용한 역학적 요소를 지닌 기술로 주먹과 손발을 이용한 막기・지르기・찌르기・치기와 발을 이용한 차기를 각종 서기 자세에서 취하는 것이다.태권도에는 단급제도가 있는데 무급에서부터 시작하여 유급자, 유단자로 올라간다. 유급자는 10급에서부터 역으로 1급까지이며, 유단자는 1단에서부터 9단까지 승단하게 된다. 단, 유단 칭호는 만15세 이상자에게만 주어지며, 그 미만인 어린이는 단의 칭호 대신 품의 칭호를 부여한다.
 
 
 
인삼(人蔘)은 그 뿌리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식물로, 고려인삼 또는 조선인삼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Korean Ginseng’이라 한다. 인삼의 학명은 ‘Panax Ginseng C. A. Meyer로 Panax는 그리스어 Pan(모든 것)과 Axos(의학)가 결합된 복합어로 ’만병통치약‘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한국 인삼은 현재 일본의 죽절인삼, 중국의 삼칠인삼, 미국 인삼, 러시아 인삼 등 세계 각지의 다른 인삼과 과(科)와 속(屬)만 같을 뿐 그 품질과 효능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인삼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 인삼이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0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서였으며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에도 소개되었다고 한다. 특히 산삼의 뛰어난 효능이 알려지면서 서양인들은 한국을 산삼이 나는 신비한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프랑스 선교사 자르투는 1711년 한국의 산삼을 그림으로 묘사하기도 했으며, 벨기에인 고셍은 1902년에 발간한 《조선》에, 한국 인삼이 진귀한 특산물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까지 진상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에밀》의 작가 장 자크 루소가 생전에 고려인삼을 애용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전집에 나와 있으며, 1996년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 미테랑이 사망했을 때, 3개월의 그의 시한부 인생에서 7개월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삼을 복용한 덕분이었다는 내용이 르몽드지에 대서 특필된 적도 있다.

이처럼 인삼의 신비로운 약효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옛 기록 가운데 5세기경에 저술된 중국의 의학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인삼은 오장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오래 살게 해준다”고 적고 있다.최근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인삼은 피로를 풀어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며 동맥경화증을 예방하며, 혈압과 혈당을 낮추는 기능이 있으며, 노화를 방지하고 성기능을 회복시키며 여드름・기미・무좀 등 피부 질환에 잘 들으며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등 그 효능에 대해 세계 의학계도 놀랄 정도이다.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한 탈춤은 한국 민중극의 극치임에 틀림이 없다. 탈춤을 말 그대로 풀이해보면 탈을 쓰고 노는 놀이이다. 자신을 숨기는 탈(가면)을 쓰고 평소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는 행위이다. 한마디로 서민들이 양반이나 무당, 아내와 첩, 또는 하인의 행색으로 분장하여 짜증스러운 현실을 놀이화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처럼 직업적인 배우가 따로 있을 필요도 없다.

또한 무대와 관객을 따로따로 갈라놓는 다른 나라의 가면극과도 사뭇 다르다. 공연자와 관객이 한 마당에서 어울려 즐기는 마당놀이이다.그렇기 때문에 탈춤은 민중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놀이로서 발전되어 왔다. 거침없는 행동과 걸죽한 입담으로 양반들의 허위와 가식을 가차없이 풍자해내는 말뚝이의 모습이나 고명한 파계승이 여인을 희롱하는 모습 등 하나같이 민중들의 비판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일반서민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억압받는 자신의 울분을 통쾌하게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서울마당 같은 곳이 있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직접 공연되고 있는 탈춤을 쉽사리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전승이 거의 중단되었던 탈춤이 다시 일반대중의 일상적이고 보편화된 대중예술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국의 탈춤은 전국 곳곳에 고루 분포되어 내려오고 있다. 안동 하회별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의 별신굿탈놀이, 서울 경기 일원의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또 봉산, 강령, 은율 등의 황해도 해서(海西)탈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지역에서 놀이되는 야유와 오광대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종묘제례(宗廟祭禮)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에 봉안된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음악・노래・춤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종묘의 제례는 선왕이 이룩한 업적을 찬미하여 신명(神明)에게 고하고, 후손들의 창성(昌盛)과 복록(福祿)을 구하기 위해 지극한 예와 조화로운 음악으로 공경을 표현하는 엄숙한 의식이다.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에는 일종의 모음곡인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2곡이 사용된다. 보태평은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종묘제례에서 첫잔을 올리는 절차인 초헌(初獻) 등에서 사용되는 음악이고, 정대업은 역대 왕들의 무공(武功)을 기리는 내용으로 종묘제례에서 둘째, 셋째 잔을 올리는 절차인 아헌(亞獻), 종헌(終獻) 등에 사용된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1449년 세종이 전래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처음에는 궁중 내에서의 각종 의식과 잔치 등에서 연주되다가, 세조 때인 1463년에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에서 연주하기 위해 개편하여 세조 10년(1464년)부터 종묘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종묘제례악은 장중한 리듬과 곡조의 우아함이 단연 돋보이는데, 아악기와 함께 대금과 같은 고유 악기도 함께 편성되어 독특한 가락이 편종이나 편경과 같은 맑은 음을 내는 타악기의 음색과 어울려 장중하고 느린 선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종묘제례악에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 뒤따르는데 보태평 춤인 문무(文舞)와 정대업 춤인 무무(武舞) 두 종류가 있다. 문무를 출 때는 손에 관악기의 일종인 약(蘥)과 꿩털 깃으로 만든 적(翟)을 잡으며, 무무를 출 때에는 나무로 만든 검과 창을 잡고 춤춘다. 모두 조선왕조을 건국한 업적을 춤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문화체육관광부〕